승리자의 역사

2008. 11. 3. 10:40읽든지 말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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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故고우영 화백의 조선야사실록-오백년,연산군을 읽고 있습니다. 읽고 있다기 보다는 우선 한번 쓱- 읽었습니다. 굉장히 단순한 그림체 인 듯 하면서도, 조선시대의 의복이라든가 그런 걸 잘 나타내었고, 중간중간의 고우영 화백의 맛깔스런 대사처리 등등도 정말 재미있습니다. 뒷 부분으로 가면서(연산군) 어린이, 청소년들이 보기엔 좀 거시기한 내용들도 많이 나오고, 정말 조선의 임금님들이 저랬을까 싶을 정도의 눈쌀 찌푸려지는 내용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고우영화백같은 걸출한 만화가가 또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백년에서 보면, 세종대왕의 병약한 아들인 문종임금이 요절하고, 그의 총명한 어린 아들인 단종이 즉위를 합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호전적인 기질이 있던(만화에서 그렇게 나옵니다.) 수양대군이 문종을 폐위하고 스스로가 임금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러면서 문종의 가지를 쳐내기 시작하는데요, 그 중에 잘 알려진 김종서 장군이 있고요, 이 만화에서는 아무래도 야사(野史)이다보니 김종서 보다는 그의 심복이었던 이징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릴 적 이징옥, 이징옥의 난 뭐 이런 내용을 좀 접해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자세하게 빠져들어서 그 내용을 알아가니 또 다른 재미가 있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승리자에 맞춰져서 쓰이는 것이고, 계유정난을 일으킨 세조(수양대군) 또한 왕이 된 후에는 성군이 되었다 하니 이징옥의 경우에는 그저 반란은 일으켰던 그런 인물로서 정사(正史)에서는 비춰집니다. 이런 거 보면 역시 역사는 승리자의 역사, 이긴 반란은 혁명이요, 진 반란은 쿠데타(coup d'état - 亂)이다 라는 게 그대로 걸맞는 군요.
* 야사중 보면 숙청당한 김종서의 아들과 아버지에 반대하던 수양대군의 딸이 혼인하여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인가요?
* 이미지는 시판되고 있는, 제가 읽은 만화책 오백년의 4권입니다. 표지 그림에 나오는 분이 이징옥의 어린 시절 입니다. 정말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김종서 장군이나 이징옥 장군이나 호랑이도 후덜덜 떨었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이징옥이라는 분에 대해 좀 알아보자면 말이죠.

이징옥(李澄玉)은 본관(本貫)이 인천(仁川)이며 호는 원봉(圓峰)시호는 충강(忠剛: 正祖15년)으로써1399년에 태어나 1453년 서거 하셨다.
조부 이조판서 인천군 이만영( 李萬英)의 자 전생(全生)세종 때 양산군봉 양산부원군의 둘째 아들이다.형 징석(澄石)아우 징규(澄珪)삼형제는 경남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부터 무용이 특출하였다
이징옥은 13세 때 서당에서 돌아오던 중 오십여 명의 도적 떼를 만나 삼형제 합세하여 모두 사로 잡아 마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 후 도적떼가 없어 마을이 평온하였다 한다.
14세 때 어머니는 어린 아들들의 성장 과정에서 놀라운 일들이 많아 걱정하시면서 하루는 어머니가 살아있는 멧돼지를 보고 싶다 하시자 징석과 징옥은 급히 산으로 올라가 높은 산 깊은 계곡을 헤매면서 형 징석은 그 날 멧돼지를 잡아 살아있는 놈을 끌고 올 수 없어 결국 죽여서 메고 돌아왔다. 징옥은3일간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행여나 호사나 당했는지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태산같이 걱정을 하던 차에 징옥은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효심으로 큰 송아지만한 멧돼지를 사로잡아 칡넝쿨로 다리를 묶은 채 어깨에 메고 집 앞 마당에 내려 놓았다. 이를 본 어머니는 너는 장래 대장군이 될 것이라 하시자 어머니 저는 장차 대황제가 되겠습니다라는 그 시대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들의 대단한 포부를 들었다.
징옥은16세 때 호사나 호환으로 민폐가 극심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관가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호사나 호환으로 인한 민폐를 막기 위해 김해 부사 정종을 찾아 청을 드렸으나 시골 소년이라며 문전박대 하자 화가 난 징옥은 한걸음에 높은 산에 올라 대호를 잡아 관가에 들어서니 정종은 기겁을 한 채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 애원하였다. 징옥은 말하기를 호랑이를 잡아 민폐를 돌보지 않는 부사는 호랑이 밥이 되어 마땅하다며굴복시켰다.
그 날 날이 저문 귀가길에 산 아랫마을에서 여인의 슬픈 울음 소리가 들려 찾아가 보니 여인의 남편이 호식당했다는 말에 대밭 속으로 달려가 포식을 하고 있는 대호를 단숨에 잡아 여인의 원수를 갚고 가죽을 팔아 장례를 잘 치르게 하였다. 사서 야사에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삼형제 이징석,이징옥,이징규는 무과에 장원급제 하였다.

소년 절제사 이징옥
이징옥은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태종16년(1416)에 부거책장(수비대장)역임,18세에 무과 친시,별시,장원급제하여 영북진 절제사,소년 절제사가 되었다.
소년 절제사 이징옥은 북방 천하에 무예를 과시하는 한편 그 후 경원 절제사,경원 병마절제사,회령 북진절제사,경상도 도절제사,평안도 도절제사,함길도 도절제사,지중추원사,판중추원사를 두루 역임하였다.태종16년에서 단종에 이르기까지 사군 육진 개척의 국토 방위의 임무에 전념하였다.
(세종실록)세종대왕께서는 삼장수를 낳아주신 부 전생에게 어주를 하사하며 삼형제에게 주연을 베풀어 주면서 경들이 남북으로 나라의 기둥이 되었으니 국태민안이라 또한 임금이 나랏일을 잘 다스릴 수 있었다 하시면서 만대에 그 공을 잊지 않으리라 하시었다.

사군 육진 개척의 공을 치하하다.
(문종실록)문종2년 사군 육진 개척에 용감히 위명을 떨친 공과 청렴결백의 숭고한 정신을 함양하고자 왕의 특령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당대 무신 제일의 從一品의 품계를 왕으로부터 하사 받았다.
이징옥은 여진족들이 고구려 후예 영토와 지도자를 잃고 명나라에 핍박 받고 살아가는 동족임을 인식하고 여진족과 친선 수렵 대회를 자주 개최하며 호랑이를 잡아 무릎을 꿇게 하여 무위를 과시하였다. 심지어 여진족들은 이징옥 장군이 나타나면 십 리 밖에서 하마하여 무릎을 꿇고 이사가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사군 육진 개척의 위업은 만주 땅 요동까지 이름을 떨쳤으며 여진족을 무위와 덕과 지혜로 승복시켰다. 이징옥 장군의 위풍과 무용에 감탄한 여진족은 신의 존재로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하였다.

계유정난과 이징옥의 대금제국
함길도 도절제사 재직시 1453년 계유정난을 맞아 수양이 소인배 무리들과 합세하여 왕권 야욕의 거사를 실행하면서 김종서 장군과 많은 충신을 주살하고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 장군이 크게 장애가 되므로 아무런 이유 없이 직위를 파직하였다. 파직당한 이징옥 장군은 문종 왕께서 국변이 없는 한 경을 부르지 않겠다는 어명을 상기하며 수양의 음모로 알고 후임 박호문을 군재에 의해 처형하고 불사이군이란 충절을 명심하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백성을 위해 수양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 기회에 여진족은 오랜 세월 동안 영토 수복권을 주장하고 그 곳을 떠나지 않고 부족 자치국의 존재성을 내적으로 유지하고 열망하던 영토 수복을 때를 맞춰 태양처럼 추앙하는 영도자 이징옥 장군을 황제에 추대하여 대국가 건설에 앞장서자며 오부족 대표 건주여진 추장 누르하치의 조부 기오창까가 주창 특사 김수산 부장 일행과 합의 대금황제국(大金皇帝國)을 건국, 영토를 만주 전역으로 선포하고 도읍을 오국성(五國城)만주땅(혁도아랍)건주여진 본거지에 정하고 대금제국황제(大金帝國皇帝)에 이징옥 장군을 추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징옥 장군은 나라 걱정을 하며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특사 김수산 부장 일행의 간곡한 청을 거절하게 되면 앞뒤로 적을 맞게 되는 중대한 귀로에서 난세로 판단, 하기로 결심하고 이징옥 장군은 많은 장정들의 대열 앞에 높이 서서 엄숙하게 우렁찬 목소리로 수양이 김종서 장군과 많은 충신들을 주살하고 백성을 버리니 우리는 두만강을 건너 큰 나라를 세워 사필귀정을 맹세하자 하며 대금제국(大金帝國)대금황제(大金皇帝)에 제위하였다.
민족의 한을 품고 만주 요동 땅을 기점으로 천하통일의 야망으로 대금제국(大金帝國)건국을 선포하였다. 대민족 건설에 대금제국의 깃발을 들고 대금제국 만세, 대금제국 만세 함성의 소리는 북방천지 만주 땅 요동을 진동시킨 장엄한 대금제국의 행렬이 오국성(五國城)입성 전야에 수양의 밀지를 받은 정종, 이행검의 흉계로 야습을 당해(이 전투에서 한팔로 수십명을 죽였다함)백일몽으로 대금제국의 운명은 역사의 비극으로 일생과 같이 밤이슬로 막을 내렸다.
사군 육진 개척에 위명을 떨쳤으며 북방 국토 방위 수호에 일생동안 전념한 이징옥 장군의 공은 우리가 재평가 해야 할 것이며 오천 년 역사상 황제로 추대된 단 한 사람이란 인물로서 누군가 난, 자칭 황제라 했던 왜곡된 역사는 바로잡아야 한다. 대금제국 건국은 민족 동질성 회복 민족사 재창출의 계기였으며 이념과 정신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충강공 이징옥 장군께서는 계룡산 동학사 숙모전과 영월 장능 단종 배식단 사우에 사육신과 더불어 충신으로 모셔 지난 역사를 되새겨 주고 있다.

작가는 좀 더 확대하여 이징옥이 대금제국을 건설하였다면, 지금의 중국, 즉 청나라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 나라가 동아시아의 최대, 최강 국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野史 이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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